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차 빈 공방전 (문단 편집) == 개전과 전황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c37f2ac5597a18afce34779e8bcf6502.jpg]] 1683년 7월 14일 카라 무스타파 파샤가 지휘하는 오스만의 15만 대군은[* 30만이라고 하지만 과장으로 보며 실제론 15만~17만으로 보고 있다.] 마침내 다시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인 빈에 당도했다. 이번의 원정군은 1세기 전과는 그 양상이 달랐다. 그러나 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엄청난 전략적 실수를 범하는데, 당시 빈 성채를 무리하게 들이치려다 병력과 물자만 날려먹고 실패한 사실을 거울삼아, 이번엔 아예 '''성을 포위한 상태로 버텨서 말려죽이기로'''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리하여 17일부터 포위가 시작되었다. 애초부터 장기전을 염두에 둔 원정이었기에 준비한 물자도 병참도 과거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물론 병력과 화력 역시 1차 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시 오스만 제국의 형편에 비추자면 심각한 각출이었다. 대조적으로 당시 빈의 주둔군은 1만 1천여명, 자원병 5천여명으로 1세기 전보다 더 빈약했다. 비록 1세기 전에 비해 서유럽 전체의 국력이 향상되었다고는 하나, 중부 유럽을 통치하는 오스트리아의 패권은 [[30년 전쟁]]의 후유증으로 약화된 상황이었다. 특히나 오스트리아는 사방에 적국[* 오스만 제국 만큼 프랑스도 위협적인 적이었는데, 특히 오스트리아의 월경지인 [[슈바벤]]과 [[알자스]] 일대의 외지오스트리아(Vorserösterreich)는 프랑스에게 살금살금 갉아먹혀 결국 [[라인강]]이 오늘날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이 되었다.]이 산재한데다가 [[보헤미아 왕국|보헤미아]], [[헝가리 왕국|헝가리]], [[크로아티아 왕국|크로아티아]] 모두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이 왕위를 겸하는 느슨한 [[동군연합]] 체제였을 뿐,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중심으로 한 단일 중앙 집권 체제를 갖추지 못하여 어느 한쪽으로 힘을 편중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파사우]]로 피난간 합스부르크 왕가의 [[레오폴트 1세]]는 빈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성벽 주위의 주택들을 허물어 성벽을 넘어올 것을 대비해 화망을 집중시킬 공터를 만드는 등 철저하게 대비를 했다. [[파일:external/deadliestblogpage.files.wordpress.com/1-vienna-1683.jpg]] 마침내 교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차 때처럼 격렬한 공방은 없었다. [[오스만 제국군]]은 애초부터 빈을 말려죽일 심산이었기에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오래 버티는 길을 택했다. 장기간에 걸쳐 튼튼한 포위가 이어졌고 빈 내부의 시민들은 물자난으로 인해 온갖 고초를 겪었지만 그럼에도 필사적으로 저항하다보니 요새는 함락될 기미가 없었다. 빈의 주둔군은 1차 때처럼 자체적으로 적을 물리친다는 목표에 대해서는 체념했지만, 대신 외부로부터의 구원을 믿으며 끈질기게 항전했다. 하지만 8월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더욱 심각해져 요새벽 또한 오스만군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무너지기 직전인 곳이 곳곳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방어군과 시민들 사이에서 굶주림과 피로는 점차 커져만 갔다. 특히 경계 임무 시 조는 자는 즉각 총살이라는 극약조치도 동원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한편 외교력이 뛰어났던 레오폴트 1세의 노력으로, 좀 늦게 파견되기는 했지만 마침내 [[기독교]] 세계를 수호한다는 명목 하에 [[신성 동맹]]의 원군 7만 4천이 파견되었다. 이 7만의 구원군 중 대다수인 4만 7천은 신성 로마 제국 전역에서 모집된 병력이었고 나머지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친정을 온 [[폴란드-리투아니아]]군 2만 7천이었다. [[로트링겐 공국|로렌]] 공작 샤를 5세[* 레오폴트 1세의 손녀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하는 [[프란츠 1세]]의 할아버지다. 레오폴트 1세의 이복 여동생 엘레오노레와 결혼한 인연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을 도와 참전했다.]이 이끄는 구원군 중 일부가 빈 북서쪽 5km 지점까지 진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엔 도시의 심정은 절박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제국군은 15만에 달하는 오스만군의 포위망을 풀지 못했다. 9월, 구원군 본대가 빈 근처까지 도착했다는 소식에 다급해진 오스만군은 총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포격을 퍼붓고 갱도를 파는 등의 전술은 1차 때와 같았지만, 이번에는 화약의 성능이 좀 더 좋아져 있었다. 갱도에 화약을 매설하고 폭파시키자 빈의 요새벽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별모양 요새 중 뾰족한 부분인 라벨린의 요새벽이 무너져 폭 12m의 폭이 생겼고 오스만군은 이를 통해 요새 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방어군은 사력을 다해 저항했으나 9월 8일, 결국 라벨린이 오스만군에게 점령당했고 방어군은 도시 성벽까지 무너질 것을 대비해 시가전으로 전환할 태세를 갖췄다. [[파일:external/3.bp.blogspot.com/polishwingedhussarsvien1683.jpg]] 이제 빈에게 남은 선택은 [[이스탄불|콘스탄티노폴리스]]처럼 도시에 오스만 제국의 월성기가 걸리는 것 뿐. 이렇게 빈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전철을 따라가나 싶었지만 함락 직전인 9월 12일, 폴란드군이 나타나 오스만군을 공격했다. 성을 함락시키느라 정신이 팔려있던 오스만군은 뜻밖의 적에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패전했다. 적의 지원군은 예상하지 못하고 빈 공격에만 치중해 있었기 때문에 배후가 허술할 수밖에 없었고, 그 배후를 친 선봉이 하필이면 강력하기로 이름난 [[윙드 후사르]]였던 것도 컸다. 결국 오스만군은 이번에도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오스만군은 빈 수비군과 유럽 연합군의 병력을 압도했다. 하지만 장기간의 포위전으로 많이 지쳤던터라 병사들의 사기가 저하된데다 장비도 여전히 구식이었다.[* 대포 사거리가 빈 수비군보다 떨어져서 빈 수비군의 포격에 오스만군이 큰 피해를 입을 정도였다.] 화력에서도 열세라 대포가 여전히 유럽 연합군보다 적었고[* 당시 빈의 오스트리아군은 대포가 무려 312문이나 있었지만 실제 운용 가능한 대포는 141문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래도 150문의 대포를 가져온 오스만군에게 지지않을 정도의 화력이었고 신성 동맹의 지원군이 대포를 140문이나 가져오자 당연히 화력에서 압도될수밖에 없었다.] 화기가 부족해 병사들에게 총을 충분히 지급하지 못해 활을 그대로 쓸 정도였다.[* 더욱이 오스만군은 구식인 매치락을 썼기 때문에 플린트락으로 무장을 바꾼 빈 수비군에게 개인화력으로도 밀리는 판국이었다.] 게다가 오스만군 내부도 총사령관인 카라 무스타파 파샤가 독선적으로 일처리를 하다보니 장군들의 불만이 컸고 오스만군 휘하의 타타르인들은 강압적인 무스타파를 정말 싫어하여 제대로 협조하지도 않았다.[* 영화 비엔나에서도 타타르인들이 무스타파를 싫어하는게 티가 나서 그의 명령을 대놓고 거부한다.] 한마디로 단합력도 최악이었던 것. 반면에 유럽 연합군은 단결이 잘 되어 있었고 사전에 정찰병을 계속 보내어 오스만군의 동향을 철저하게 분석하여 오스만군이 의외로 허술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공격했으니 승리할 수밖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